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적화통일]]과 기나긴 전쟁의 종식 === || [[파일:external/i.telegraph.co.uk/April-30-1975-tank_1626541i.jpg]] || ||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대통령궁으로 진입하는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베트콩]])의 [[T-54|T-54B]] 전차.[* 사진 속 844호 단차는 선두가 아닌 후속 차량이다. 선두였던 843호(같은 T-54B)와 390호(중국제 59식) 단차가 베트남 전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사진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의 일부 보수 논객들은 북한 주석궁에 [[한국군]] 탱크가 진군해야 진정한 [[남북통일]]이라고 이야기한다.] || 그 와중에도 레민다오[* Lê Minh Đo 1933~2020. 남베트남군의 몇 안되는 유능하고 청렴한 지휘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통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했다느니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전쟁이 끝난 뒤 북베트남군에 생포되어 16년 동안 복역했다가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 준장이 지휘하는 5,000명 남짓의 18사단은 소수의 증원 병력으로[* 사이공 북부를 지키고 있던 5사단과 레인저 부대 일부가 헬기편으로 지원되었다.] 사이공 북동쪽 60km 지점에 있는 소도시 쑤언록에서 1개 군단, 45,000명 규모의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4월 9일부터 21일까지 무려 보름 동안 막아내는 저력을 보였다. 이 전투는 사실상 이 전쟁 마지막 국면에서 벌어진 유일한 정규전이었다. 당시 북베트남군을 지휘하던 반띠엔중 장군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전투"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그래서 사이공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하지만 북베트남군은 병력을 7개 사단으로 늘려서[* 그동안 3일 정도 공세가 멈췄는데, 전(前) 남베트남 공군 사령관이자 부통령이었던 [[응우예까오끼]]는 자서전에서 이게 자기 지시로 투하한 [[데이지커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2차 공세를 감행했다. 주변 지역부터 제압당해 보급로가 끊기고, 포위당한 18사단은 결국 3군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아 21일 부로 쑤언록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1개 사단이 아무리 분투한들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이 전투는 [[최후의 5분|남베트남군이 불태운 마지막 불꽃]] 이상은 되지 못했다. 18사단은 이후 사이공 동부 방어선에 배치되어 끝까지 싸우다가 사이공이 함락되던 날 항복하고, 사단장 레민다오 준장은 생포되어서 포로가 된다. 쑤언록이 함락된 4월 21일에는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이 [[하야]]하고 곧바로 남베트남을 탈출한다.''' 이후에 4월 30일에는 결국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까지 함락되었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국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 파리 강화 협정은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전쟁의 막바지에는 공산화가 코앞인 남베트남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미국을 비롯한 대한민국 등 [[제1세계]]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입안했다. 남베트남을 포기할 수 밖에 없을 경우에 대비하여 세운 작전의 일환이다. 흔히 프리퀀트 윈드 하면 당일 새벽 미국 대사관 철수 작전을 떠올리지만 이것은 최종 탈출 작전인 옵션 4이며 프리퀀트 윈드 작전은 옵션 1~4로 구성되었다. 옵션 1은 떤선녓 공군 기지 및 남베트남의 다른 공항을 통해서 민항기로 공중 수송하는 것이었다. 옵션 2: 군용기로 공중 수송. 옵션 3: 사이공 항만을 통해서 해상 수송. 옵션 4: 최종 계획으로서 헬리콥터로 공중 수송. 일단 작전이 수립되자 비행기편 및 선박편을 통해 자국민들을 남베트남 밖으로 피난시키고 있었으며, 한국 역시 베트남에 있던 한국인들을 데려오기 위해 [[대한민국 해군]] [[전차상륙함|LST]] 2척을 파견하였다. 이들 LST들은 공식적으로는 소개 목적이 아니라 구호품 전달 목적으로 출항했다. 그래서 도착하여 구호품 전달식도 거하게 치르고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상황이 악화되자 해군 본부에서는 다 내던져도 LST 선박이라도 탈출시키라고 한 시간 단위로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LST 함대 사령관의 독단으로 교민 철수 작전을 지시한다. 문제는 교민들 상당수가 돈을 벌기 위해 왔던 [[불법체류자]]였다는 것. 그런데 남베트남 측에서 한국 대사관에 뜻밖의 제안을 하는데 남베트남의 VIP 500명을 수송해주면 비자 검사 안 하고 한국인들을 보내주겠다는 것이다. 결국 동의하고 수송 작전을 시작한다. 한국 교민들은 웬만큼 다 태웠는데 남베트남의 VIP는 가족을 제외하고 본인만 150명밖에 안 왔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여 한밤중에 그냥 출발하였는데 먼저 출발한 수송선은 한밤중에 불을 전부 켜두고, [[베트남인]]들을 전부 위에 올려 "너희 나라 사람들이니 죽일 테면 죽여라!" 하는 식으로 북베트남군들이 장악한 수로를 탈출하여 나왔고, 3시간뒤에 출발한 2번째 수송선은 반대로 불을 다 끄고 플래시 하나로 물길을 보면서 탈출하였다. 남베트남 측에서는 VIP를 다 안 태웠다고 정선하라! 안 그러면 나포하겠다! 하며 협박하는 상황이었고, 출항 후 북베트남 해군 YTL이 위협적인 기동을 하며 다가오자 [[중기관총]]을 사격해 쫓아내는 등 위험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들이 출발한 항구는 다음날 폭격당하였다. 그러나 대사관 직원 15명은 본국의 훈령을 어기고 탈출을 거부하여 남았다. 그러나 긴 전쟁 기간 동안 나름대로 베트남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민간인들은 자신의 재산을 놓고 떠나기를 주저했고, 설상가상으로 4월 28일 떤선녓 공군 기지가 폭격당한 후에는 비행기편을 통한 탈출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주월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은 비상 시 미국 대사관 직원 및 미국인 그리고 호주, 영국, 태국, 싱가포르, 프랑스 등을 비롯한 동맹 국가 시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프리퀀트 윈드 옵션 4를 요청하고, 이것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마지막 군비 지출이 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igon-hubert-van-es.jpg]] 미국 국제 개발청 직원 숙소 옥상 LZ로 몰려드는 사람들. [[http://en.wikipedia.org/wiki/22_Gia_Long_Street|미국 대사관으로 흔히 '''잘못 알려진''' 사진이다.]][* 이곳이 한국 대사관 직원들에게 배정된 시큐리티 포인트 3이었다. 한국 대사관 직원들은 시큐리티 포인트 3로 탈출하라는 미국 대사관의 지시를 받고 건물로 진입을 시도하였지만 입구에서 [[한국인]]들을 태워 가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문을 안 열어 주었다. 결국 급박한 상황 속에 직원들은 그냥 조금 더 내려가면 있는 미국 대사관으로 강행했다. 하지만 조금 늦게 도착하여 문 두들기다가 실패한 이대용 공사 외 2명은 한국 대사관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들은 그대로 공산 베트남에 억류되어 기나긴 포로 생활을 한다. 아마도 너무나 혼란스러워 미국 대사관과 시큐리티 포인트3 사이에 연락이 실패한 듯 하다. 마지막으로 나타나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가 실패한 한국일보 특파원 안병찬 기자에 의하면 "만약 들어갔어도 내 차례가 와서 헬기를 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라고 했다.] 아래 나오는 영상에도 이 장면이 마치 그레이엄 대사의 탈출 장면처럼 나와있다. 4월 29일 오전 11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최종 단계인 옵션 4가 발동, 떤선녓 공항 내 DAO 및 미 대사관의 LZ(Landing Zone) 등 사전에 선정된 LZ를 통해 [[미국인]]과 동맹국가 시민의 탈출이 개시된다. 29일 저녁까지 사전 탈출 대상자로 지정된 5,000명의 사람이 전원 탈출을 완료하고 DAO를 비롯한 시내의 LZ가 폐쇄되어 마지막 탈출구는 이제 미국 대사관 옥상만이 남았다. 미국 대사관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탈출하려는 미국인들과 주로 유산 계층이나 남베트남에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베트남인 및 소수의 일반 [[베트남인]]들이 몰려들어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이 때 상황은 한국일보 특파원으로써 4월 30일 새벽 5시 마지막 헬기편으로 탈출한 안병찬 기자의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를 보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또한 1990년대 드라마인 [[머나먼 쏭바강]]에서도 사이공 함락 이후 주인공이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하는 과정을 아주 정확히 묘사해 놓았다.] 말 그대로 소리없는 아우성 그 자체다. 4월 30일 새벽 5시 헬기편으로 주월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을 포함한 2,100여 명의 피난민이 탈출했고, 2시간 후 대사관을 경비하던 미 해병대 병력 11명 역시 대사관에 걸려 있던 [[성조기]]를 내려 챙기고 탈출 헬기에 오르며 주월미군의 베트남 전쟁은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종료와 함께 그 종지부를 찍는다.''' 남베트남의 붕괴 당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포함한 미국의 철수 작전, 그리고 자발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남베트남 국민은 총 13만 8869명이었다. 이 작전 중 주월미군은 총 78대의 헬기를 동원했는데 남베트남 육해공군 조종사들도 헬기나 경비행기 등을 몰고 베트남 앞바다의 미 해군 함대로 날아오며 계속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미 해군은 이들 항공기들을 계속 받아 줬는데, 나중엔 착함할 자리가 모자라 바다에 헬기를 버리기까지 했다. 개중엔 남베트남군 [[치누크]] 조종사들이 가족 등을 태우고 바다로 탈출하던 중 발견한 미 해군 함정에 접근했는데, 치누크의 크기에 비해 착함할 공간이 작아 사람들을 헬기 갑판에 뛰어내리게 한 다음 조종사는 치누크를 바로 옆 바다에 불시착시키고 탈출해 구조된 경우도 있었다. 고정익기들은 모두 착수 후 구조되는 식으로 탈출했다. 물론 민간에 구조된 민간인 대다수는 배를 이용해 바다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 [[파일:사이공 함락.jpg|width=100%]] || || 사이공 대통령 관저를 점령한 북베트남군들 || 그리고 4월 30일 정오경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대통령궁에 진입해 [[금성홍기]]를 게양하고 즈엉반민 대통령으로부터 항복을 받으면서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부온마투옷이 함락되면서 남베트남 몰락의 포문을 연지 겨우 55일 만이었다. 수도 사이공이 함락될 무렵 [[껀터]] 등 메콩강 삼각주 일대에서는 남베트남군 4군단이 아직 살아남아 저항을 이어가고 있었다. 4군단 사령관 응우옌콰남 소장과 부사령관 레반흥 준장은 사이공과 연계해 게릴라전을 벌여 북베트남군에게 피해를 입힌 후 메콩강 삼각주 만이라도 간수할 수 있도록 휴전협상을 이끌어내려 했으나 사이공이 함락되었으며 북베트남군에게 항복하고 무장을 해제하라는 즈엉반민 대통령의 명이 전해지자 부대를 해산한 후 자결하였다. 2군단장 팜반푸[*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 프랑스군으로 참전했던 인물이다.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가 제네바 협정 이후 월남하여 남베트남군 사령관이 됐다.] 소장, 제5사단장 레응우옌비 준장, 제7사단장 쩐반하이 준장 역시 사이공 함락 소식을 전해듣고 부대를 해산한 후 자결하였다. 그리고 5월 3일까지 북베트남이 남베트남 전역의 장악을 완료하면서 기나긴 전쟁은 종결된다. 북베트남군과 북베트남의 지도부들은 최소 1976년까지는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던 전쟁이 고작 '''4개월 만에''' 끝나버리자 놀랐다. 그들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그리하여 남베트남에서는 베트콩이 정권을 잡고 이듬해인 '''[[적화통일|1976년 북베트남과의 통일을 선언하고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비극적인 예상대로 또는 야심찬 의도와는 반대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절반이 적화되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마저 적화되버린 것이다. 의외로 쿠데타가 밥 먹듯이 일어나던 [[태국]]이 적화되는 일은 없었다. 단, 태국의 경우는 원래 막장 국가급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태국은 [[라마 9세]]라는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단결이 잘 되어있는 왕국이었고 지금은 아니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태국은 한국보다 잘 살았다. 미국이 악몽스럽게 생각했던 인도의 공산화도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도는 [[인도 국민 회의]]당 등 비(非)공산 계열 정당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쥐며 민주적 정체를 유지하던 나라였다.] 인도는 친 소련이지만 미국과도 무난한 관계를 가졌고 반중적인 입장이 된다. 미군은 베트남에서는 철수했다. 그러나 1년 뒤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는 함모 전단을 끌고 와서 위력을 과시한다.[* 이쪽은 남베트남만큼 막장이 아니었고, 북한이 먼저 선을 넘었고, 중남미에는 온두라스를 선제공격한 엘살바도르에게 압박을 가했고 특히 칠레만큼은 아옌데가 사회주의 정책을 제데로 시행하지 못하도록 미국이 마음놓고 개입할 수 있다.] 대만도 마찬가지로 대한민국보단 막장도가 덜했지만 중국이 대만을 무력점령을 할 경우 다음 표적은 한국 일본 필리핀등 마음놓고 침공하고 해상을 드나들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은 무조건 위력을 과시한다. 이 당시 탈출하지 못한 남한 교민 100여명과 [[중앙정보부]] 출신 이대용 공사 등 주월 한국 대사관 직원들과 대사관으로 피신해 와 있던 교포 등은 굶주려가며 북한으로 납치당할 두려움에 시달렸는데, 종전 직후엔 북베트남 측도 정신이 없다 보니 대사관 직원들을 그냥 방치해 두고 있었다. 대사관 밖으로 나가면 사로잡힐 것이란 공포 때문에 대사관 안의 식량이 소진되어도 섣불리 식량을 사러 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 직원이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인들한테 하도 당해서, 지금도 프랑스인들을 무서워 한다. 트럭에 프랑스 국기를 꽂고 다니면 아무도 손을 못 댈 것이다."라는 제안을 했고, 실제로 프랑스 국기를 단 트럭이 지나가자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고 순순히 비켜 주어, 무사히 식량을 구매해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와중에 주월일본대사관에 한국으로 전신을 보내 줄 것을 일본대사관 문 밖에서 일본 직원에게 쪽지를 건네며 부탁해 본국과 간간히 연락하는 등 조금씩 버티다, 사태가 좀 수습된 뒤 한국 대사관 직원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보고를 받은 북베트남 당국이 이들을 전부 구금했다. 공산 베트남은 남한 교민들의 대부분을 조건 없이 석방했지만 북한측의 요구에 따라 이대용 주월 공사 등 대사관 직원들을 생포하여 5년 동안 억류했다. 남한 정부는 경제 원조 등을 조건으로 내걸며 이대용 공사 일행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철저한 반공노선을 취하던 당시 유신정부가 적화통일의 수괴인 북베트남에 경제원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자 코미디였기에 한국 입장에서도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억류자를 돈 주고 풀려나게 하는 건 말로는 간단하지만 국가 대 국가의 외교적 맥락에서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공산 베트남은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이유로 수락하지 않았다. 1979년에 [[중월전쟁]]이 터지고 북한은 중공 편을 들어서 북한과 공산 베트남의 관계도 악화되었고,[* 공산 베트남은 베트콩과 짝맞게 자력으로 통일을 했는데 북한은 미국이 베트남을 계속 붙잡아야 된다고 공산 베트남을 이용해 먹었다. 여러모로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 적화통일 도와달라고 구걸하는 것도 모자라 뜬금없이 베트남에서 미군 철수를 반대했으니 북베트남 측에선 황당한 일이었고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물론 공산국가에서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북한은 이대용 공사 일행에게 사상적인 전향 및 월북을 강요했다. 이대용 공사 일행은 북한측의 협박, 회유를 완강히 거절했다. 공산 베트남측은 남한 정부에게 얼마간의 경제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포로를 석방한다. 이대용 공사 일행은 1980년이 되어서야 석방되어 한국으로 귀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